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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여는글] 삼성에서 일한 8개월 (13년 1월)2013-01-2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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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일한 8개월 회원 유매 1. 난 삼성전자 협력사에서 일한다. 정확히 말하면 삼성전자의 한 부서와 계약을 맺고 그들을 갑으로 모시는 에이전시에서 일한지 8개월 됐다. 2. 삼성은 일하는 사람을 필요에 따라 대단히 쉽게 버리는 기업문화로 이미 악명이 높은데, 서초사옥은 그 상징과도 같다. 처음 출근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쌀쌀한 아침 공기에도 아랑곳 않고 스무 명 남짓 집회 인파가 정문 앞에 모여 있었다. 경비를 맡은 젊은 경호원들은 혹시라도 그들이 회사 안으로 들어올까 관광버스를 다닥다닥 붙여 벽을 만들었다. 정작 날 깜짝 놀라게 한 것은 확성기로 볼륨을 한껏 높인 민중가요 소리였다. 집회 현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긴 하지만, 강남 한복판에서 들리니 조금 생경했다. 게다가 소리는 얼마나 큰지 19층에서도 바로 창밖에서 튼 것처럼 또렷이 들렸다. 첫날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다 민중가요가 귀에 들어오면 남몰래 씩 웃었다. 사무실 안 다른 직원들은 모르는 지원군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때부터 거의 매일같이, 해 뜨는 시간 내내 울려 퍼졌다. 3. 처음엔 생각했다. 누가 왜 집회를 하는 거지? 나중에 슬쩍 물어볼까. 유인물을 나눠주면 받아야겠다. 그리고 하루, 이틀, 한 달, 두달. 조금씩 궁금증은 ‘차후에 할 일’이 됐다. 집회는 몇 개 단체가 돌아가며 하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현수막을 흘깃 보며 반도체 백혈병 유족이군, 오늘은 해고자네, 내일은 철거민이 올 차례인가 눈으로 셈을 해보기도 했다. 4. 그러거나 말거나, 회사에서는 잊을 때쯤 한번씩 ‘쉬쉬하는 일’이 터졌다. 일한지 3개월 됐을 때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 한명이 삼성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유는 괘씸죄. 협력사이긴 해도 멀쩡히 에이전시와 정직원 계약이 되어 있는 사람을 자르네 마네 하다니… 충격이었다. 같이 사무실 사람들은 “**씨 일, 남일 아니예요. 우리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니까요”하면서 위로 섞인 푸념을 했다. 또 한 달쯤 뒤엔 삼성전자 정직원 한 팀이 무더기로 잘렸다. 대리 한 명이 무슨 실수를 한 모양인데, 그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몰라도 대리, 과장, 상무까지 모조리 해고됐단다. 5. 시간이 지나자 비인간적이라고 치를 떨던 삼성 문화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갑들 비위도 제법 맞추고 업무에도 속도가 붙었다. 그쯤부터였나. 창밖에서 들리는 민중가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계절이 몇 번 바뀌었는데 저 사람들은 지겹지도 않나? 맨날 시끄럽게 악 쓰지 말고 좀 스마트한 방법으로 시위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 변화가 느껴졌다. 정직원들과 같은 서초사옥에서 근무하고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회의하다보니 정직원 같은 사고방식이 자리 잡은 거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집회를 누가 왜 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가치가 빠르게 바뀐 것이 서글퍼졌다. 6. 그리고 며칠 전, 삼성은 내게 ‘후퇴’ 통보를 했다. 나를 삼성에 파견했던 에이전시로 다시 ‘빠꾸’시킨다는 뜻이다. 내가 일하던 팀을 개편하면서 내 업무 자체가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다. 일주일의 정리 기간이 주어졌다. 황당하고 억울하고 열 받는 일이었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사람들이 내게 “**씨 일, 남일 아니예요. 우리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니까요”하면서 위로 섞인 푸념을 했다. 짐을 챙겨서 정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1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8개월 동안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갑’에 빙의되어 있었던 것이 우스웠다. 사실 난 갑을관계의 ‘을’ 정도도 아니고 ‘갑, 을, 병, 정’의 ‘병’ 쯤 됐었는데… 착각과 오만을 제대로 겪어서 쪽팔린 2012년이다. 2013년에는 언제나 분수를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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