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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여는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바라며 (12년 10월)2012-10-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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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바라며 교육국장 새벽별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촌동생이 서울에 시험을 보러 오니 이틀만 함께 있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동생이 왔고, 나는 주말 일정들이 있어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사촌을 대한문에 데려가 보기로 했다. 사촌동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라 조금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천천히 설명해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약속장소를 대한문으로 잡았다. 인천에서 회의를 끝내고 가니 약속시간보다 30분을 늦었다. 마침 그 날 대한문에서는 우리 사회에 불안정 노동이 만연한 문제와 관련해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동안 사촌은 혼자 문화제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일단 저녁을 먹어야 하니 밥을 먹으러 갔고, 내가 문화제가 어땠냐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촌이 먼저 말했다. “언니야, 아까 사람들 나와서 하는거 보니까 내가 일하는 데랑 똑같더라. 청소하는 아줌마도 그렇고…” 동생은 대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구매팀 업무를 하는데 정규직들은 고가의 물품을 구매하고, 비정규직인 동생은 중저가의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다를 뿐 업무 내용은 동일하다고 했다. 미디어에서 많이들 나오는 이야기에 동생의 개인적 경험이 담긴 내용이 뒤섞여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사촌의 분노는 특정한 개인과 집단을 향했다. 회사를 향한 불만을 이야기 할 때보다 더 큰 분노가 느껴졌다. “정규직 남자애들은 정규직 여자들한테만 인사하고 우리한테(비정규직) 인사도 안한다. 우리가 숫자가 더 많은데도…” 동생이 일하는 구매 팀은 스무 명 남짓인데, 비정규 여성 노동자들이 절반 이상이라 했다.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월급은 정규직들의 절반도 안 된다고도 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어떤 싸가지 없는 정규직 남자사원은 대놓고 이렇게 얘기한다. 이런 허드렛일은 비정규직 여자애들 시키면 되지. 니가 왜하냐?” 흥분해서 이야기 하는 사촌동생에게 해 줄 말이 참 없었다. 동생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진짜 못된 놈들이네. 나쁜 것부터 배워가지고는.” 정도의 맞장구 밖에는. 그리고 다시 우리는 문화제를 보러 대한문에 갔다. 그리고 쌍용차 분향소에 가서 인사를 시키고 쌍용차의 내용을 담은 <의자놀이>를 선물했다. 사촌동생은 이런 일들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각 부문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각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공연도 하며 어두운 현실이지만 손 맞잡고 나가자는 흥겨운 대동놀이를 하며 문화제는 끝이 났다.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또 고민했다.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이번에도 역시 동생이 먼저 말했다. “근데, 왜 그 사람들은 똑같은 조끼를 입었는데?”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리게만 봤던 동생이 참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낮은 한숨을 쉬며 내뱉었던 동생의 이 말은 아직까지도 너무 생생하다. “언니야, 정규직 남자애들이 무시할 때마다 자존심 상하고 짜증나서 빨리 정규직으로 떳떳하게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다짐하거든. 근데… 그게 참 어렵다.” 동생의 시험결과가 발표되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한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생은 시험결과를 확인하며 또 낮은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자기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얼굴들이 떠올라 화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문에서의 문화제가, 밤새 읽었던 <의자놀이>에 담긴 이야기들이 동생에게 조금은 힘이 되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계약직으로 살고 있는 너의 현실이 너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처음 만난 본 투쟁조끼를 입은 노동자들과 함께 한 어설픈 팔뚝질의 경험이 앞으로 동생의 삶에 조그만 희망의 싹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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